"아베는 진심으로 사죄하라" 진보ㆍ보수단체도 모처럼 한목소리
16일 오후 서울 종로구 인사동 쌈지길에 갑자기 애국가와 아리랑이 울려 퍼졌다. 록밴드와 오케스트라 악기가 뒤섞여 내는 소리에 인근을 지나던 시민들이 하나 둘 몰려 들었다. 합주의 주인공은 서울 대진고ㆍ대진여고 재학생과 록밴드 ‘마스0094’등 40여명. 2013년 진한 감동을 준 대학생들의 ‘인사동 아리랑’의 고교생 판이었다. 이들과 함께 이날 이벤트를 기획한 서울대 멘토링 모임 ‘가이드러너’의 임대성(22ㆍ소비자아동학부)대표는 “광복 70년을 맞아 외국인들이 많이 모이는 인사동에서 연주 플래시몹을 진행하면 의미가 클 것으로 생각했다”고 의도를 설명했다. 연주 뒤 심벌즈를 맡은 임성현(16ㆍ대진고 1년)군은 “7월 초부터 오늘을 위해 연습했는데 광복절에 뜻 깊은 일을 한 것 같아 뿌듯하다”며 환하게 웃었다.
광복절은 더 이상 과거의 치욕을 되새기며 비통함을 곱씹는 날이 아니다. 시민들은 애국선열의 넋을 기리던 엄숙한 분위기에서 벗어나 독립의 기쁨을 노래하는 축제의 장으로 광복절을 즐기고 있다. 연휴 내내 이어진 축제의 시작은 15일 오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개최된 ‘태극기 플래시몹’이었다. 중앙 경축식의 병행행사였지만,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하나의 주제 아래 어울리는 플래시몹의 의미처럼 1,000여명의 시민이 한데 모여 대형 태극기를 완성해 갔다.
이날 태극 부채로 물결쳤던 광화문광장을 비롯해 전국 곳곳에서 열린 광복절 기념행사에서는 종일 웃음과 환호가 떠나지 않았다. 서울 여의도 한강시민공원에서는 40여분간 불꽃 30여만발이 밤 하늘을 수놓아 시민들의 눈을 즐겁게 했다. 또 부산에서는 1945년 광복에 즈음해 해외동포들이 고국으로 돌아오는 모습을 형상화한 ‘해방귀국선 재현 행사’가 개최됐고, 경북도 독립운동기념관은 ‘독립군가 부르기 합창 경연대회’를 여는 등 시민과 함께 호흡하는 광복절 행사가 줄을 이었다.
그렇다고 여흥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광화문 세종대왕상 앞에서 진행된 ‘우리 군과 태극기’ 기획 사전전과 ‘태극기 그리기’ ‘광복탐사대 OX퀴즈’ 등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은 놀이로 아픈 역사를 기억하는 배움의 현장이었다. 여섯 살 난 아들과 광장을 찾은 박재운(38)씨는 “어린 아들도 따분하지 않게 역사를 공부할 수 있어 유익했다”고 말했다.
이념과 성향에 따라 사사건건 대립하던 시민ㆍ사회단체들도 이날만큼은 진심어린 사죄를 부정한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의 종전 70주년 담화를 비판하고 일본 정부의 각성을 촉구하는 등 모처럼 한 목소리를 냈다. 진보단체인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은 광화문광장 근처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일본 정부는 아베 담화를 통해 침략과 식민지배를 부정하고 군국주의 본색을 드러냈다”며 “이웃 나라들을 상대로 다시 침략을 강행하겠다는 선포나 다름없다”고 지적했다. 보수성향의 대한민국어버이연합 회원 등 100여명 역시 서울 중학동 옛 일본 대사관 앞에서 “일본은 일제 침략의 진실을 조직적으로 삭제ㆍ조작ㆍ은폐함으로써 군국주의 부활을 꿈꾸며 세계사에 씻을 수 없는 범죄행위를 자행했다”고 주장했다.
김석호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최근 몇 년 전부터 모든 세대의 공감을 이끌어 내기 위해 서서히 변해오던 광복절 분위기가 올해 70주년을 계기로 확실하게 도드라진 것”이라며 “아베 총리의 담화가 이념을 초월해 국민을 하나로 결집하는 효과도 냈다”고 분석했다.
박주희기자 jxp938@hankookilbo.com